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검의 밤 (문단 편집) == 결과 == [[파일:ZETFgCa.jpg]] > '''이제는 두손들어 하일 히틀러!''' >---- > 영국의 만화가 데이비드 로우의 만평. 해외에서는 이 전대미문의 숙청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건 조직폭력배나 할 일이지 총리가 할 짓은 아니다"라고 생각했으며 "이 사건은 명백히 히틀러가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이며 법적인 절차도 없이 이루어진 불법행위였다"며 히틀러를 맹렬히 비난했다. 나치당원 사이에서조차 히틀러에 대한 불만이 있었으며 나치당 내부에서조차 [[에른스트 룀]]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자 히틀러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1934년 7월 13일 의회에서 연설을 하여 불만을 가라앉혔다. > "인간은 영원히 똑같은 강철의 법칙에 따라 반역을 파괴합니다. 누군가 어째서 정상적인 재판을 열어서 판결을 내리지 않았느냐고 우리를 비난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이 순간에 나는 도이치 국민의 운명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었고, 따라서 도이치 민족의 최고 재판관이었노라고 말입니다!..... 나는 이 반역죄의 주동자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우리 내면의 우물을 오염시킨 종양을 빨간 살이 보일 때까지 잘라내고 소독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무도 국민의 존재를 - 이것은 내면의 질서와 안전을 통해서만 확보되는 것입니다 - 위태롭게 만들고도 벌을 받지 않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누구라도 국가를 향하여 한방 먹이려고 손을 쳐들었다가는 더욱 확실한 죽음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 요아힘 C. 페스트, 히틀러 평전 2권 845P 이 연설이 끝난 직후 국회에서는 히틀러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졌으며 시민들도 기뻐했다고 한다. 돌격대의 계속된 폭력 행위에 지긋지긋했던 시민들은 단호하고 과감한 결단으로 돌격대를 제거한 아돌프 히틀러의 결단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선전장관 괴벨스가 [[에른스트 룀]]이 쿠데타를 기도했으며 국가를 뒤엎으려고 한 반역자였기 때문에 룀을 숙청한 것은 정당한 행위였다고 선전을 하자 독일 내의 불만은 잠잠해졌다. 나치에 반대하던 보수파는 한때 총리까지 지냈던 슐라이허와 [[프란츠 폰 파펜|파펜]]의 측근들까지 죽은 것을 보자 자신들도 언제든지 제거될 수 있음을 깨닫고 겁을 잔뜩 집어먹었고 자신의 측근들이 제거당한 파펜 본인조차도 겁을 잔뜩 집어먹고 히틀러에게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다.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힌덴부르크]]는 장검의 밤 사건 당시 자신의 충복이었던 슐라이허 장군까지 참살됐는데도 히틀러에게 감사를 표하며 '''"단호한 행동과 용감한 개인적 개입으로 반역의 씨를 미연에 제거하고 독일 국민을 커다란 위험으로부터 구하였다"'''며 히틀러를 칭송할 정도였다. 계엄령을 선포하겠다며 히틀러를 위협했던 군부도 히틀러에게 만족하여 블롬베르크를 비롯한 군부 수뇌부가 히틀러에 충성을 맹세했다. 돌격대의 숙청 과정 중에서 합법적인 수단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독일 공법학회 권위자집단 학자들도 [[카를 슈미트|'''"총통은 최고의 인민재판관으로 실정법에 구애받지 않는다!!"'''라는 실드]]를 쳤을 정도였다. 또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문제를 제대로 지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압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후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뒤이어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의 지위는 이제 독일에서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경에 오르기에 이른다. 그리고 돌격대 숙청의 1등 공신이었던 친위대는 돌격대가 이루지 못한 '진정한 인민군'의 꿈을 [[무장친위대]]라는 형태로 실현했다. 룀이 가지고 있었던 돌격대 참모장 지위는 [[빅토어 루체]]가 계승했다. 히틀러는 공식적으로 돌격대 최상급 지도자의 위치를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장검의 밤 사건에도 불구하고 SA는 해체되지 않았으나 사건의 여파로 그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떨어졌다. 400만에 달하는 조직을 갑자기 해체하기도 어렵고 이용하지 않는 것도 아까웠기 때문에 SA 조직 자체는 계속 유지하기로 결정되었는데 이후 나치당에 가입하지 못하는 기회주의자들이 대거 SA에 가입하면서 돌격대 조직은 개나 소나 가입하는 보편적인 나치 조직이 되었으며, 나치당 입당 전에 돌격대에 가입해 거기서 공을 인정받아서 나치당에 정식 입당하는 테크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정치깡패]] 노릇만 했던 이전과는 달리 새 돌격대는 조직원들에게 고급 교육을 받게 하고 자체 군사 조직인 펠트헤른할레를 창설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시키고 조직원들을 차출하여 국방군 공군과 육군 부대로 전속시켜 싸우게 하였다. 이는 룀의 뒤를 이어서 돌격대 참모장이 된 빅토어 루체가 장검의 밤 이후 땅에 떨어져버린 SA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들인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장검의 밤 이전의 지위를 되찾기 위한 이런 노력은 1943년 빅토어 루체가 휴가 도중 [[아우토반]]에서 [[교통사고]]로 죽자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돌격대는 1934년의 숙청 때처럼 서서히 몰락하여 친위대의 지원 조직이나 예식용 부대로 치부될 정도로 전락했다. 즉, SS에 사실상 흡수되어 버린 것. 하지만 펠트헤른할레 자체는 1945년 부다페스트에서 종전을 맞기 직전 와해될 때까지 활동했다. 장검의 밤은 독일의 동성애자들에게는 [[헬게이트]]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룀의 [[동성애]] 성향을 알고 있었던 언론이 이를 이유로 갈궈댈 때에는 다른 이도 아닌 히틀러 본인이 1930년 룀의 동성애 비판에 대해 "돌격대는 군대지, 도덕집단이 아니다.", "개인의 사생활에는 관심없다."는 시대를 앞서간 동성애 옹호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의 보호막이었던 [[에른스트 룀]]이 제거되자 그걸로 끝이었고 이후 동성애자들은 대거 [[다하우]] 수용소로 잡혀 들어갔다. 장검의 밤은 히틀러와 SS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지만 한동안 독일의 길거리에는 긴장감이 맴돌게 되었다. 비록 상층부는 손쓰지도 못하고 모두 목이 날아가 버렸지만 여전히 하급 돌격대원들은 대다수 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본 사건에 불만을 품은 일부 돌격대원들에 의해서 친위대원들이 뒷골목 등에서 살해당하거나 린치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들은 대세를 뒤집을 정도로 파급력이 크거나 조직적이지도 못하였으며 룀의 사망 직후부터 나치 제2인자 자리를 둘러싼 지도부의 내부 투쟁이 심했다. 히틀러의 공언도 있고 해서 흔히 헤르만 괴링이 제국의 2인자였다는 인식이 있는데 실제로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괴링의 입지는 힘러, 괴벨스 등 경쟁자들보다 압도적이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집권부터 종전에 이르기까지 나치 독일의 핵심세력들은 끊임없이 내부 투쟁으로 홍역을 앓게 되었다. 때문에 당이 바쁘기도 해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